동지(冬至) / 정홍근
팥죽을 사러 간다 발간 백열등 아래 김을 모락거리며 시장통 좌판에서 마지막 뜸을 들이는 불그스름한 옛 기억을 사러 간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싫었을까 새알심만 남긴 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면 할머니는 내 것까지 보태어 나이를 드시고 어느 겨울, 눈 덮인 산길로 걸어가셨다
하늘에서도 할머니는 팥죽을 쑤시는지 아침부터 둥그런 새알심이 하늘에 널리고 나이를 헛먹은 나는, 뒤늦게 팥죽을 사러 간다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 주던 동치미도 긴 긴 밤 할머니의 이야기 소리도 없지만 오늘, 팥죽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울 것이다 마지막 새알심 하나까지 남김없이 먹을 것이다
팥죽을 사러 간다 오랫동안 목에 걸렸던 그리움을 사러 간다
♣정홍근
시인, 작곡가, 한국사진문학협회 운영위원(기획국장), 계간 한국사진문학 시부문 신인상 제1회 한국사진문학상 최우수 <저작권자 ⓒ 시인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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