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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호랑나비 / 신금재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1/06/02 [05:05]

멕시코 호랑나비 / 신금재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1/06/02 [05:05]

멕시코 호랑나비 / 신금재

 

 

얼마 전 멕시코 호랑나비 수천 마리가 한파에 죽었다 한다.
곰이나 사슴 등 야생동물이 죽었다는 소식은 자주 뉴스에 나오곤한다.
지난주에도 벤프 철길을 건너던 새끼곰 두 마리가 기차에 치였다는 뉴스를 전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세운다 한다.
오늘은 나비가 죽었다 한다.
어떤 나비일까, 자못 궁금하였는데 지난주 글렌모어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멕시코 호랑나비가 철새처럼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장장 사천오백 킬로미터를 날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려준 지인은 특히 식물이나 동물 등 자연에 관한 것들에서는 전문가 못지않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
"안나, 저 다리 아래 좀 봐"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 있지. 그게 제비집이라네'
다리 아래가 잘 안 보여 고개를 푹 숙이고 보니 어머나, 세상에
시멘트로 만든 다리 아래, 사람 눈에 잘 안 뜨이는 으슥한 곳에 제비집이 엄청나게 많이 붙어있었다.
새봄이 되면 제비들이 날아와서 저곳에 알을 낳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주까지도 제비들이 보였는 다 날아갔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는 여기로 멕시코 호랑나비도 날아온다고 하였다.
"멕시코 호랑나비라고요" 귀가 번쩍 뜨였다.
얼마 전에 뉴스에 나왔던 그 장소가 바로 여기, 그 멕시코 호랑나비들이 알을 낳고 돌아간다는 그곳이라고 한다.
내 눈은 더 휘둥그레졌다.


아, 그랬구나. 우리 집 마당에 날아다니던 그 호랑나비들, 내가 보살피고 있는 데이케어 아이들이
잡으려고 쫓아가던 그 나비들이 멕시코에서 여기까지 날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캐나다로 돌아오는 나비는 네 번째 후손인 제 사 세대 나비들인데 팔 개월을 살아서 가장 오래 사는 세대라고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 캐나다
그들은 어떻게 몇 세대를 뛰어넘어서 왔던 길을 기억하는 걸까
자장과 햇빛의 방향을 따라 날아오는 그들의 날개에 본능의 힘이 숨어있는 것일까.
한 세대도 아니고 삼 세대를 건너뛰어 이어지는 그 원형질의 힘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나의 아버지는 황해도 실향민이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이산가족 찾기방송을 할 때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고 온종일 방송에 귀를 기울이셨다. 나중에 치매가 와서 고향 집에
가신다고 열린 대문으로 나가신 후 우리는 한동안 아버지를 찾아 헤매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평소에 고향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이다음에 통일되면 꼭 가봐라, 하시면서 어릴적 우리를 무릎에 앉히시고는 고향주소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려주시며 국민교육헌장처럼 외우게 하셨다.
'황해도 벽성군 교정면 송림리 124번지' 아마도 아버지의 고향에는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에서 통일되지 않는 한 북으로 간다는 건 거의 절망적인 소원이었다.
캐나다에 이민오고 난 후 주변 사람들이 북한을 다녀오는 것을 간혹 보게 된 후 나도 언젠가 한번
기회가 주어지면 북한을 방문해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고향마을의 흙이라고 담아와서
아버지의 무덤가에 뿌려 주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이 고향집 주소였으니.

미국에 사는 사촌 언니는 몇 년 전 북한에 다녀왔다.
여행하다가 황해도 근처에서 고향을 못 간 친척들을 위하여 흙을 조금 담아왔다고 하면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예전의 고향이 아니야, 하면서 풀죽은 목소리를 전하였다.
사촌 언니는 어렸을 적 북한에서 살았으니 달라진 고향의 모습에서 적지 않은 실망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그 분위기를 떠올리려고 하니 흘러간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허공을 젓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고향에서의 어느 날,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사촌오빠는 우리 집안에 서구문물을 제일 먼저 전해주는 문화와 문명 전도사였다.
카메라가 새로 나오면 그 카메라를 들고서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우리 삼 남매를 국화꽃 만개한 마당에 세워놓고 일렬횡대를 군인답게 외치면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지금도 그 사진은. 백일 사진, 돌사진 하나없는 내 생애 최초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그때 녹음기가 나왔었나 보다.
그 녹음기로 아버지께서 고향이야기 하실 때 녹음을 한 모양이었다.
이민오고 몇 해가 지나 고향방문 갔을 때 사촌오빠는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불쑥 아버지 보고 싶나,
하고 물으며 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앞에 녹음테이프를 불쑥 내밀었다.
어쩌면 젊어서의 카랑카랑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눈앞이 흐려져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녹음된 내용은 사촌오빠와 함께 자잘한 일상을 나누시며 피난을 함께 온 고향 어른들 안부도 물어보고
아버지는 대답하시고 마치 깊은 산 속에서 선승들이 주고받는 선문답처럼 나에게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그때는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저러실까, 기왕에 떠나온 고향, 아니 떠밀리듯 쫓겨내려온 곳,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창호지 문 사이로 나누어진 사랑방에서 들려오던 아버지의 고향이야기


아마 이때쯤이었지, 들판에 벼들이 누렇게 익어 고개 숙였는데 공산당들이 들이닥친 거야.
그날로 이제는 틀렸구나 싶어 형님들과 의논하여 그날 새벽 탈출을 계획하고 웃돈을 얹어주고
뱃사공을 구하였는데 그만 그 작자가 돈에 눈이 어두워 밤도망을 쳤지.
결국 하루하루 늦어지다가 해를 넘기고서야 겨우 일 사 후퇴 때 섬으로 가는 배를 구할 수 있었지
안방에서 학교 숙제를 하던 나는 사랑방 쪽으로 점점 길어지는 나의 두 귀를 만져보고 또 만져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왠지 모를 아득한 슬픔같은 안개가 서려 오곤 하였다.
그러나 늘 고향 쪽으로만 온몸의 촉수를 세우고 도무지 지금의 현실에서는 발을 떼고 사는 듯한 아버지가 때로는 미워지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해 가을 우리 집 마당에는 온갖 종류의 국화가 만발하였다.
아버지는 여러 종류의 국화를 심으시고 가꾸셨는데 시들시들 앓던 국화도 아버지 손길만 닿으면 생생하게 살아나곤 하였다.
꽃 이파리가 돌돌 말려 올라가던 노란 국화, 금국화가 유난히 많았는데 아버지가 운영하는 이발소 수입으로는 우리 학비 대기도 어려워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꾼 국화들을 자그마한 화분에 담아서 미군 부대 앞에 가서 팔아오곤 하셨다.
아버지가 걸어가는 뒷모습에서는 언제나 국화꽃들이 넘실거리며 그 뒤를 따라가곤 하였다.
해지는 저녁이면 아버지는 마당 가에 앉으셔서 가끔 하모니카를 불곤 하셨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악기를 배우신 것도 아닐 텐데 아버지는 어떻게 아시는지 하모니카를 구성지게도 참 잘 불으셨다.


아버지는 가끔 시조를 읊기도 하셨는데, 아마도 추측건데 지금의 내가 잘 써지지 않는 글을 부여안고 끙끙거리는 것은 시조를 멋지게 읊으시던 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멕시코 호랑나비의 그 어딘가에 들어있는 아버지의 고향 원형질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이 나를 아버지의 고향 북한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인지 멕시코 호랑나비처럼 나의 피에도 북한을 그리워하는 원형질이 DNA에 남아있는 지
북한 사투리를 쓰는 어르신들을 어쩌다 만나기라도 하면 손이라도 잡아 드리고 싶어진다.
멕시코 호랑나비처럼 사천 오백 킬로를 스스로 날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북한을 방문하여 아버지 고향에 가보고 싶다.


그곳에는 아버지를 닮은 가을 금국화가 지금도 피어 있는지 창 밖으로 날아가는 호랑나비 한 마리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창 밖으로 마치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뒷마당 가에 만개한 금국화들 사이로 호랑나비들이 날아다닌다.

나비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데이케어 아이들 모습에서 유년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국화꽃 사이에 서 있던 모습이 겹치며 눈물이 흐른다.

 

♣신금재 작가 

서울 출생 

2001년 캐나다 이민 

[시집] 내 안의 아이,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전자시집] 사슴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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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거리 문협, 캐나다 여류문협, 서울디카시인협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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