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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작시(醉中作詩) / 정이흔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3/09/09 [13:49]

취중작시(醉中作詩) / 정이흔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3/09/09 [13:49]

취중작시(醉中作詩)

 

 

낮에 마신 낮술은 

제풀에 지쳐 이미 나를 떠났다

 

나도 낮술의 힘을 빌릴 기회를 놓쳤다

시 한 편을 고스란히 날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순리에 따르지 않았던 탓

이런 상황에서 취중작시는 머릿속 상상일 뿐

 

창작에의 강박은 이미 길을 잃었다

 

지금 혈중알코올농도로는

불쌍한 강박관념에 측은지심을 보일 여력조차 없다

그저 키보드 위를 뛰어다니는

멍청한 손가락의 양심을 믿는 수밖에

 

애꿎은 술병 두 개만

분리수거함 유리병 칸으로 직행한다

내 손으로 오늘의 기억을 지운다

 

오늘이 떠나고 있다

취객의 모습에 안쓰러움만 남기고

부지런히 갈 길을 가고 있다

 

나도 오늘을 앨범 속 기억으로 남길 뿐

넘기다 찾지 못하면

영원히 잊혀도 좋은 기억으로

 

그냥 한잔 마시면

복잡해지는 머릿속과 

공연히 바빠지는 손가락만 가엾을 뿐

 

이제 막 열두 시를 넘겼다

 

 

 

▶정이흔

한국미술협회 정회원

제21회 시인투데이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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