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작시(醉中作詩)
낮에 마신 낮술은 제풀에 지쳐 이미 나를 떠났다
나도 낮술의 힘을 빌릴 기회를 놓쳤다 시 한 편을 고스란히 날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순리에 따르지 않았던 탓 이런 상황에서 취중작시는 머릿속 상상일 뿐
창작에의 강박은 이미 길을 잃었다
지금 혈중알코올농도로는 불쌍한 강박관념에 측은지심을 보일 여력조차 없다 그저 키보드 위를 뛰어다니는 멍청한 손가락의 양심을 믿는 수밖에
애꿎은 술병 두 개만 분리수거함 유리병 칸으로 직행한다 내 손으로 오늘의 기억을 지운다
오늘이 떠나고 있다 취객의 모습에 안쓰러움만 남기고 부지런히 갈 길을 가고 있다
나도 오늘을 앨범 속 기억으로 남길 뿐 넘기다 찾지 못하면 영원히 잊혀도 좋은 기억으로
그냥 한잔 마시면 복잡해지는 머릿속과 공연히 바빠지는 손가락만 가엾을 뿐
이제 막 열두 시를 넘겼다
▶정이흔 한국미술협회 정회원 제21회 시인투데이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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