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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을 생각한다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7/09 [11:39]

낫을 생각한다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7/09 [11:39]

낫을 생각한다

 

이덕대

 

 

  우리 곁에서 사라진 말들이 많다. 까막눈이란 말이 그렇다. 무식하여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눈 또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얕잡아 이를 때 쓴다. 까막눈을 일컬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 한다.

 낫은 섬뜩하고 예리하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를 어릴 때부터 낫이 곁에 있었다. 잘 갈린 낫을 잡으면 고사리같이 작은 손에도 저절로 힘이 생겼다. 명품 표식으로 대장간 낙인(烙印)이라도 명토 박아 나온 낫은 자랑거리 그 자체였다. 사람한테든 나무나 풀 같은 것이든 낫을 휘둘렀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고 끝장을 본다는 뜻이다.

 낫이 지나간 자리는 어떻게든 정리가 되었다. 벼나 보리는 거두어 들여졌고 풀과 나무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산과 들의 그 어떤 것도 낫 앞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낫이 지나간 자리는 뿌리만 남긴 채 사라져야 했다. 절대적 힘을 가진 도구지만 생명의 근원까지 절멸 시키지는 않았다. 낫은 가끔씩 어우름이고 자비(慈悲)였다.

 

 낫이 사라진 시골은 잔인하고 공포스럽다. 힘들게 세월을 등짐 진 백발의 노인은 굉음을 내는 예초기를 돌린다. 순식간에 풀밭이 사라지고 절단만이 한가득이다. 그래도 예초기(刈草機)는 훨씬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이다. 칼날이 섬뜩한 풍경을 만들지만 삶과 죽음을 분리할 뿐 종족 말살(抹殺)까지는 아니다.

 예초기마저 사용할 힘이 없는 시골은 제초제란 이름의 저승사자가 온 땅을 황량한 사막으로 만든다. 누렇게 변하다가 끝내 새카맣게 타버린 풀과 땅은 기괴하다. 풀벌레나 개구리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오로지 인간이 탐하는 것만 남은 땅은 단정한 죽음을 품고 있다.

 가축을 먹이기 위해 논두렁 밭두렁에서 풀을 베던 낫질은 천사의 빗질이었다. 아이의 낫질은 아이의 자연을 만들었고 어른의 낫질은 살림살이의 근본이었다. 사내들의 거칠고도 섬세한 낫질은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기르며 우거진 풀숲 속으로 빛나는 햇살을 데려왔다. 

 

 도심 아파트 화단은 여린 풀들과 망초꽃이 간들바람에 흔들린다. 도시에서 대우받는 자연이 별로 많지 않지만 제초제에 거부감 많은 사람들 덕분에 예초기로 다듬어진 화단에는 자연이 숨 쉰다. 해가 떠오르면 꽁지 새빨간 고추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고 달빛 어우러진 저녁이면 철석이가 노래한다. 아파트 정원사의 시원찮은 솜씨가 오히려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주었다. 피난 떠나지 못한 달맞이꽃, 뚱딴지 대궁도 바람에 몸을 흔들며 살아있음을 자랑한다.

 낫은 사라졌지만 예초기가 낫이 되어 자연을 가꾼다. 가난했던 산골 아이는 인연 하나 없는 낯선 도심에서 낫을 그리며 어른이 되어 산다. 지금 시골은 낫도 예초기도 사라지고 오로지 제초제만이 사용되는 듯하다. 이웃이 사라지고 자연이 멸절(滅絶) 되면 자신도 생명이 다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세상을 지배한다. 요행히 죽음의 제초제를 견디고 살아남은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괴물로 변한다. 당연히 그것들도 내일을 장담 못 한다.

 낫만으로 자연과 어울려 살던 때를 꿈꾼다. 낫에 대한 아련한 기억마저 흐릿해지면 무엇으로 도심의 자연들과 이야기할까. 제초제라도 뿌리는 듯 우리 편이 아니면 완전히 끝장을 보겠다는 까막눈 군상들의 무식한 행태로 요즘 여름은 너무 덥다. 낫이 사라지면서 뭣도 모르는 까막눈들이 온 세상에 제초제를 뿌려대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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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현재)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

한국수필 신인상(2021)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선정(2023)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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