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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꽃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9/24 [15:38]

웃음꽃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9/24 [15:38]

웃음꽃

 

이덕대

 

 

  잊힌 시간을 찾아가는 것은 현재의 자신을 깨우는 일이다. 얽힌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일상의 복잡함에서 잠시 놓여나 순수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면 세상에 시달리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가을바람 소리는 나그네가 먼저 듣고 가을 햇살 사위어 가는 것은 귀뚜라미가 맨 먼저 알아챈다 했던가. 잊고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지나던 발길로 찾아든 고향 빈집에는 말벌과 귀뚜라미, 탐스럽게 익어가는 무화과가 가을을 붙들고 적요한 풍경을 만든다. 그립다는 말도 정겹다는 이야기도 목젖 아래서 울컥 올라오는 그 무엇으로 인해 차마 내뱉지 못하겠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품고 살았던 곳인데 정작 눈앞에 두고도 이렇게 그려낼 수 없을 줄이야. 해가 고갯마루에 걸리도록 웃음꽃이 피었던 고향 집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다. 감나무 둥치 근처 상사화는 이름처럼 그리움을 안고 홀로 피었다. 기다림이 꽃으로 변한 듯 화려하지만 서글프다. 개망초며 달개비꽃이 인적 없는 집을 지킨다. 오래뜰 가장자리 핀 맨드라미는 닭 볏처럼 붉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꽃이다. 꽃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시공(時空)을 이어주고 삶과 희망과 세대를 연결하는 것이 꽃이다. 꽃이 없다면 연속되는 삶도 없다. 사람의 웃음은 아름답다. 혼자 웃는 웃음은 서글픔이자 비애다. 함께 모여 웃는 웃음만이 웃음이다. 아이들이 여럿 모여 깔깔대며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릴 때 웃음꽃이 피었다고 한다. 사람이 가진 최고의 아름다움은 웃음꽃이다. 사람이 살아도 웃음이 사라진 집은 빈집이다.

 푸름이 하늘을 덮고 있을 때 이 뜨락 저 마당에는 아이들의 웃음꽃이 수도 없이 피었다. 무화과 익어 벌어지고 배가 달콤한 향기를 품으면 아이들은 신이 났다. 이젠 빈집, 홀로 서있는 늙은 감나무에서 붉은 전구 같은 홍시가 떨어져 뒹군다. 흙 마당에 으깨진 홍시를 작은 손가락 두개로 들어 올려본다. 아깝다. 하늘을 보며 붉은 치마같이 단풍 든 감나무 잎사귀들에게 이야기한다. 내년 봄에도 꼭 찾아와 달라고. 시간이 나무를 키우는 것인지 나무를 지키는 것인지 어릴 때는 몰랐다. 집이 비어가고 어둠이 골목을 휘감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 어둠을 따라 익숙한 길을 걸으며 조금씩 깨달았다. 함께 있어야 나무도 집도 서로가 지킨다는 것을...., 사람도.

 

  어스름이 내리고 밤이 찾아온다. 두런두런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휘영청 밝고 둥근달이 떠올라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벌통이 놓여있던 텃밭 돌담은 무너졌지만 무화과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억센 머슴 손을 닮은 무화과 잎은 찬이슬을 말없이 받아낸다. 이슬 젖은 잎사귀 뒷면에는 잠자리 마지막 숨을 쉬며 숨어있다.

 장독대 덮은 추녀 밑에는 말벌이 둥지를 틀었다. 오래된 참나무 껍질같이 투박한 말벌 집은 나무 공 같기도 하고 마른 박 덩이 같기도 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쓸쓸하고 무섭다. 형해화 되고 있는 우주의 작은 파편이다. 한때 외양간 옆 배나무는 해마다 덩치를 키웠고 채마밭 어름 단감나무는 달콤함으로 유혹했다. 

 하지만 언젠가 사라졌다. 이른 봄밤을 밀어내던 하얀 꽃잎은 마음속에서만 피고 졌다. 그때 집은 나무를 품었고 나무는 집을 감쌌다. 감나무 잎사귀들은 하늘을 막고 서서 지나가는 바람을 붙들어 대청마루에 쏟아놓곤 했다. 이윽고 달이 이운다. 빈집 달그림자에는 이런저런 소리가 스며 있다. 세상모르던 시절 웃음꽃이 그립다. 

 



 

 

 

 

 

 

▲이덕대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김포문학(2017) 및 한국수필(2021) 신인상

한국수필 2023 ‘올해의 좋은 수필10’ 선정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수필집 출간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2023)>

  <내 마음 속 도서관(2024)>

시인투데이 작품상(2024)

  <한통속 감자꽃>

한국수필가협회 및 한국문인협회 김포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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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탄여풍 2024/09/24 [23:27] 수정 | 삭제
  • 어머니 떠난 고향집은 형님네 가족이 가득차도, 언제나 비어있는 집이었고, 가슴 한 켠에는 늘 찬 바람이 들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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