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에서 부르는 노래 / 신금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올 봄은 더디게 오는 것 같다. 그래도 산책로 건너편에 보이는 만년설은 엊그제 내린 봄눈으로 더욱 흰 빛을 발하고 높아진 하늘에는 돌아오는 철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간다. 뒷마당 양지쪽에는 가을에 떨어진 파 씨앗이 어느덧 초록 싹을 틔우고 봄비에 젖은 말간 얼굴로 인사를 보낸다. 얼어붙었던 겨울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여린 싹의 힘찬 에너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정든 대한민국을 떠나 미지의 꿈을 안고 캐나다로 왔던 그 긴 여정의 나날을 돌아본다. 2001년 이 월 중순, 김포공항에는 때 아닌 폭설이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를 망설이는 우리 가족 네 명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예정된 비행기는 출발 지연 안내 방송을 몇 번 반복하더니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전세 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이민 가방을 둘러메고 친구네 집으로 향하였다. 며칠 간의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김포공항으로 가서 밴쿠버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모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캘거리, 캘거리라는 도시는 서울 올림픽을 하던 해에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는 것과 인터넷에서 조사한 바로는 석유 경기 붐으로 취직자리가 많다는 두 가지 정보로 우리가 살 도시로 결정하게 되었다. 남편 말 대로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였다. 이민자료 두꺼운 파일을 준비하긴 하였지만 이민오기 전 그 흔한 답사도 오지 않았다. 밴쿠버 공항에서는 안내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는데 우리는 멍한 정신으로 못 알아들어 비행기를 몇 대 놓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캘거리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드디어 캘거리 공항 트랩에서 내리는데 날카로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마치 코를 베는 듯한 강한 느낌이 전해졌다. 지금은 밴쿠버 사람들이 캘거리를 칼가리라고 놀리듯이 부르는지 잘 알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다. 칼 같은 바람 때문 이라는데.
IMF, 그 이름도 유명한 것
남편은 대기업 엔지니어였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우는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고 두 번째가 그때였다. 장남인 그는 세 명의 동생들을 대학 공부시키고 차례로 분가시켰다. 가난한 장남 특유의 성실함으로 묵묵하게 회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IMF는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조용히 찾아왔다. 평생 몸담았던 직장에서 잘려진 고통을 몸으로 마음으로 울부짖더니 얼마 지나서 엔지니어 친구들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캐사모, 캐나다를 사랑하는 모임이라고 하였다. 때마침 캐나다 정부에서는 독립이민이라는 이름으로 엔지니어들을 모집하였다. 그때 나는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였고 두 아이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인천 교구 합창단에 출석하고 있었다. 캐사모에서 알았던 한 친구가 얻어준 렌트 하우스는 캘거리 북서쪽 달하우지 역 근처에 있었다. 한 달에 팔백 불 정도 냈는데 먼저 살던 중국인이 청소를 대충 하고 떠났는지 날씨가 더우면 카펫 바닥에 발바닥이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첫 일주일 동안 정부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사회 보장 카드와 의료 보험 등을 만들고나서 나는 심한 몸살로 그만 쓰러졌다. 처음 찾아간 병원에서는 맹장염 같다고 하여 앰뷸런스를 불러 큰 병원으로 갔더니 장염이라고 하였다. 겨우 항생제를 구해 먹고 며칠 누워서 쉬는 동안 현관문에 꽂힌 동네 잡지를 보았다. DAY CARE에서 교사 구합니다. 배우면서 일할 수 있습니다. 배우면서 일할 수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전화를 걸었다. 자동응답기 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였습니다. 캐나다에 온 지 이 주 되었습니다. 매거진 광고를 보고 전화 드리니 메시지 들으시면 전화주기 바랍니다. 뮤리어 원장님은 잠시 후 연락을 주셨고 다음날 무사히 인터뷰를 마쳤다. 오늘부터 일 할 수 있겠어요? 네, 물론이죠. 데이 케어에는 중동 여인 미리암과 러시아 미녀 알리샤, 캄보디아 여인과 몇 명의 캐네디언 처녀들이 일하는 다민족 기업이었다. 학교 다닐 때 영어 성적도 좋았고 이민오기 전에 선교사들이 가르쳐주는 영어교실에도 다녀서 영어는 좀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각 나라 사람들의 서로 다른 발음 벽에 부딪혔다. 다행히 다운타운에 있는 칼리지에서 오 월부터 시작하는 영어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전철로 갈아타고 학교에 가서 두 시까지 수업을 듣고 뮤리어 원장님 부탁으로 오후 근무를 하고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매일 저널쓰기 숙제를 하였다. 폴란드 출신 영어학교 선생님은 마치 스파르타 군인처럼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켰다. 다행히 영어 실력이 눈에 뜨이게 나아져갔다. 그 무렵 알리샤가 좋은 정보를 전해주었다.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였으면 알버타 주정부 교사 자격증으로 교환해준다고 하였다. 주정부 사무실에 서류를 보내고 기다리기를 몇 달, 칠 월 초 캘거리의 세계 최대 축제인 스탬피드가 열기를 띠던 어느 날 우체통에 꽂힌 누런 서류봉투를 발견하였다. 사자 두 마리 그림이 선명한 주정부 교사 자격증이었다. 자신감이 생기자 나는 영어 학교 일 층에 있는 데이 케어로 옮겼고 그곳에서 좋은 혜택을 받으며 근무하다가 매니저의 도움으로 같은 계열인 석유 회사 데이 케어로 옮겨갔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캐나다 상류층의 생활을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영어 발음이 정확하였다. 할로윈 데이에는 학부모들이 사무실로 초대하였다. 캔디와 초콜릿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나누어 주는데 벽에는 여름내 즐긴 골프 사진들이 가득하였다. 어느 해 하루 종일 할로윈 행사를 마치고 많이 피곤하였다. 전철에서 내려 주차장에 세워놓은 승용차를 찾는데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다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른 가족들에게 알렸다. 거실에 놓여있던 컴퓨터와 TV등 그리고 아들 옷이 많이 사라졌다. 다행히 남편이 하던 사업장에 직원들 월급 주려고 미리 인출해 온 현금은 안전하였다. 아마도 범인은 현금을 노렸을 것이다. 석유 회사 데이 케어에 근무하면서 처음에는 아기들을 돌보았지만 몇 년 지난 후에는 프리 스쿨 교사에 응모하였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라고 해서 한국 문화에 대한 자료를 만들었다. 각 센터에서 모인 매니저들이 나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합격 여부를 심사하였다. 다행히 한국에서 가져온 멜로디언으로 아리랑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전통 음악을 알려주고 한국 음식과 한복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만장일치로 합격하여 프리 스쿨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십 년 넘게 근무하면서 늘 마이너리티, 소수 민족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교실 벽에는 인종 차별 금지 구호가 붙어있지만 대부분 백인들이 근무하는 환경에서 나 혼자 일하다 보니 때로 실망하는 날이 왜 없었을까. 늘 독립하여 운영하는 데이 케어 비즈니스를 꿈꾸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교실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부 서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호시탐탐 노리는 척후병처럼 주변을 주시하면서 언젠가는 내가 시작하는 날을 마음 속으로 준비하였다. 인생의 기회는 때로 이상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FIRE 해고라는 단말마의 외침으로 어두운 절망의 터널이 다가왔다. 늦여름이 가고 초가을이 오는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하지, 사실대로 말하자. 그 무렵 데이 케어에서는 동부 온타리오 지역에서 새로 온 매니저와 본사 매니저 간에 파워 게임이 눈에 보이게 일어났고 우리 교실에도 나이 어린 처녀가 낙하산으로 배정되었다. 우리 딸 아이 또래라서 잘 가르쳐준다고 이것저것 알려주었는데 간섭한다고 느꼈을까. 나를 무고하였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어느 남자아이가 또 발길질을 하기에 그 아이 흉내를 낸 것 뿐인데 아이를 발로 찼다고 한 것이었다. 매일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캘거리 하늘은 무척이나 높고 푸르다. 짝짓기 하는 고추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저런 미물들도 때를 알고 다니는데 나는 무엇 하는 것 인가. 자책하기도 하고 그 처녀를 원망하면서 몇 주가 지나갔다. 걷고 걸으면서 그룹 전체 미팅하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룹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나올 때마다 전체 교사들에게 소개하는 모임을 하였는데 데이 홈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규모가 큰 데이 케어는 언제나 자리가 모자라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집에서 작은 규모로 하는 데이 홈은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일종의 틈새 시장 같은 것이었다. 그래, 맞아. 데이 홈을 창업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아들이 생활하던 맨 아래층을 비우고 독립하였다. 우선 대청소를 하면서 가구 배치를 새로 하였다.버릴 것은 버리고 남 줄 것은 주고 데이 홈에 맞도록 새로 구성하였다.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개업 플래카드를 보내주었고 이웃에서는 꽃도 보내주었다. 에이전시 사무실에서는 주정부와 연결해서 기금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제일 처음에 등록하였던 아이 이름은 찰리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은 점점 늘어서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아이들이 생길 정도로 커졌다. 데이 홈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십 년이 넘어갔다. 남편이 처음에 캐나다로 이민 가자고 하였을 때 두 가지 문제로 걱정하였다. 어떻게 해서 달러라는 것을 벌어야 하는지, 또 다른 하나는 이제 한국을 떠나면 아름다운 모국어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될 텐데 하는 마음이 들어 친정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만큼이나 아쉬움이 컸었다. 다행히 캘거리에는 한인 문인 모임이 있어서 한국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모국어의 소중함을 나눌 수 있다. 특별히 요즈음에는 디카시 활동으로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동네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어울리는 짧은 시를 쓰는 일은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공원으로 내려가는 길목, 자작나무 숲에서 나오는 향기는 디카시를 쓰고자 하는 열정을 불어 넣어주는 청량제이다. 디카시를 쓰면서 다가오는 단어는 소확행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약칭으로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A Small, Good Thing에서 따와 만든 신조어라고 한다. 이민 살이 이십 년,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다. 우리는 캠핑카를 구입하여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한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디카시를 건져 올리는 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버킷리스트에 담아본다.
♣ 신금재 작가 서울 출생 2001년 캐나다 이민 [시집] 내 안의 아이,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전자시집] 사슴의 법칙 캘거리 디카시연구소 캐나다 디카SEE 캘거리 문협, 캐나다 여류문협, 서울디카시인협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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