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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자리가 있는 풍경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4/17 [09:49]

못자리가 있는 풍경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4/17 [09:49]

못자리가 있는 풍경

 

이덕대

 

 

 온 산이 꽃대궐이다. 봄비에 물오른 오리목이며 생강나무 잎은 한껏 벙글었다. 칡과 사위질빵은 이미 넌출을 뻗기 시작했다. 산벚나무 꽃들은 온통 연분홍 차렵이불을 뒤집어썼다. 막 피기 시작한 사립문 곁 복사꽃은 웃음 머금은 처녀 뺨처럼 불그스레하다. 배꽃도 앵두꽃도 한꺼번에 피어 벌들이 잉잉댄다. 서산에 걸린 갈고리달이 은은하다. 먼동이 터오는 새벽은 붉은 여명이 이울고 산마루 늘어선 굽은 소나무 우듬지로부터 창날 같은 동살이 눈부시다.

 이른 봄에 태어난 송아지는 외양간을 뛰쳐나와 마당에서 겅중거린다. 논밭으로 일나갈 어미소와 오늘은 떨어지지 않을 심산이다. 웬걸, 펀더기 나선 철부지 송아지는 애물단지를 넘어 원수 덩어리다. 작년엔 논갈이에 따라나섰던 수송아지 때문에 낭패를 당했었다. 이리 닿고 저리 뛰며 논두렁을 밟은 통에 못자리판이 엉망진창 망가졌다.

 주인에게 빌고 다시 만드느라 경을 쳤다. 봄 일이 빈틈없어야 가을 농부 곡간이 깔축없이 들어찬다. 어미소를 끌어낸 뒤 막대기 휘둘러 송아지를 외양간에 몰아넣는다. 방앗간에서 얻어다 놓은 보리등겨라도 쌀뜨물에 타서 먹이라고 안채에 나직이 이르고 집을 나선다. 송아지 울음 애절하다.

 

 엉덩이에는 덕지덕지 붙은 두엄투성이지만 새끼로 꼰 부리망 때문인지 일나서는 모습이 옹골차다. 목덜미에는 팽나무 가장귀로 만든 멍에가 깔리는 햇살에 번쩍인다. 느릿느릿 걷는 걸음은 일 나설 때나 집 들어올 때나 똑같지만 헌걸찬 모습만은 전장(戰場)을 향해 나아가는 장수다. 흙냄새에 여린 풀냄새로 허기진 암소는 부리망 아래로 연신 침 흘린다. 겨우내 볏짚에 콩깍지며 쌀 등겨도 넉넉히 먹였는데 송아지 탓이려니 하면서 자갈돌 많은 밭갈이가 지레 걱정이다.

 일은 아니 무서워도 소는 무섭다. 말 못 하는 짐승이 힘든 농사일을 앞두고 병(病)이라도 나면 예삿일이 아니다. 짐승 좀 본다는 삼거리 황의사도 콩 넣은 여물 앞에서 누워버리는 늙은 소에는 소용없다. 막걸리에 낙지라도 먹여보라는 말이 끝이다.

 가뭄이라 그런지 논 갈러 가는 들길 이슬받이 맺힌 은방울이 발끝에 삽상하다. 어린 송아지가 떼어놓고 논일을 나서는 늙은 암소 발걸음은 느리다. 마음 바쁜 농군은 지게 작대기로 소등을 토닥이며 빨리 걷기를 연방 재우친다. 나지막이 울음을 내뱉는 암소는 집에 남은 새끼라도 찾는지 자꾸만 고개를 뒤로 돌린다. 지게에 쟁기를 짊어진 농군은 이 논 저 밭을 둘러본다. 소는 바쁠게 하나도 없다는 듯 느리게 걷는다.  

 지게를 추스르며 미적거리는 소의 코뚜레 맨 줄을 이리저리 잡아챈다.

 

 볍씨를 넣은 못자리판에는 벌써 물빛이 푸르다. 골골거리며 개구리가 떠다닌다. 가녀린 발에 은구슬을 단 소금쟁이는 바삐 논물 위를 떠다닌다. 제일 신난 것은 진흙 물고 둥지 만드는 제비다. 봄 찾아 못자리판 드나드는 목숨들은 무엇이건 쫓아내면 안 된다고 옛 어른들은 일렀다. 식구가 많아야 집안이 성하 듯 어린 모도 이런저런 뭇 생명이 찾아들어야 병 없이 자란다. 빨리 물을 잡고 볍씨를 뿌릴 생각에 마음이 사뭇 바쁘다. 앞산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뻐꾸기 소리도 신작로를 따라 못자리판까지 내려왔다. 고향에는 지금 인적 없다. 이제는 만나지 못하는 아련한 옛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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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현재)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

한국수필 신인상(2021)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선정(2023)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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