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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서사(敍事)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2/14 [16:56]

동백꽃 서사(敍事)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2/14 [16:56]

동백꽃 서사(敍事) 

 

이덕대

 

 

  노란 융단 같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겨우내 뒷바람 속에서 동백꽃이 드문드문 남아 있던 남해 보리암 가는 길을 한참 걸었던 적이 있다.

  겨울의 끝 날씨는 금산(錦山)의 커다란 바위 봉우리들이 하늘을 이고 있는 아래로 마치 봄이 온 것 마냥 담숙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짭조름한 갯내음이 섞여 동백꽃 향기를 느끼기가 어려웠다.

  푸른 잎을 단단히 걸친 채 다붓한 동백나무들은 길게 이어졌다. 검붉기까지 한 동백꽃이 뚝뚝 무리 지어 떨어져 있는 숲길은 붉은 핏빛이 뿌려진 듯 섬뜩했다.

  아픔의 꽃이자 이별의 꽃이 동백이다. 옛날 양반들은 동백을 집안에 심지 않았다. 권력의 광풍에 휩쓸려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가는 그 섬뜩한 모습이 자신들을 닮아 보여서다. 남들 위에 군림하고 잘못된 권력을 탐하다가 그 권세가 다하면 처참한 끝을 당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오르고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끝은 언제나 덧궂다. 석양 어름 땅에서 나뒹구는 꽃은 어느 꽃 할 것 없이 처참하긴 마찬가지다. 담담히 핀 꽃보다 떨어진 동백꽃이 주는 울림이 더 심오하다. 

 

  떨어질 때까지 꽃잎 하나 흩트림 없는 동백은 그래서 여인의 꽃이다. 옛적 처녀들이 시집갈 때 동백꽃으로 치장했다. 짙은 녹색의 동백나무 잎이 두꺼워 가지를 꺾어도 쉬이 시들지 않았다.

  닭 한 쌍이 올려진 대례(大禮) 상에는 하얀 쌀과 촛불, 푸른 대나무 가지와 함께 붉은 꽃을 피운 동백나무 가지도 자리를 잡았다. 생화가 없는 시기에는 마을 처녀들이 밤새 모여 만든 종이 동백꽃으로 대신했다.

  고갯마루 동살처럼 찬란해야 할 여정의 시작을 하필이면 동백꽃과 함께했던 연유가 무엇이었을까. 가슴에 안고 있던 두꺼운 동백나무 잎 다발은 앞으로 닥칠 고난과 시련도 버텨낼 마음의 준비였을지 모르겠다. 겨울꽃이 담아내는 인내와 용기는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처자에게 무거운 훈장(勳章)이자 인생 여정의 도반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풍아(風雅)한 문사(文士)는 이야기했다. 겨울 동백도 좋고 봄 동백도 좋지만, 눈 속에 피는 동백이 최고라고. 고통의 날들 속을 살아낸 여인의 한(恨) 맺힌 삶이 빛나듯 정갈한 백설(白雪) 속에서 꿋꿋하게 피워낸 꽃이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아직 눈 내리고 댑바람 차갑지만 남해의 어느 섬에는 먼바다에서 뒤척이는 물결 따라 봄바람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을까. 정갈함과 단아함으로 머리를 매무새해 주던 동백기름 품은 열매도 차차 튼실해지리니 봄 사냥 꽃 사냥 삼아 여유 있게 마녘으로 방향을 잡아 봐야겠다.

  지금쯤 보리암 가는 길목의 동백꽃은 옛 아낙들의 신산했던 삶처럼 반드시 봄에 떠나야한다는 듯 뚝뚝 지고 있을 거다. 봄이 오는데도 드팀없이 지는 동백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식을 위해 어려운 길 마다치 않던 우리 어머니들 모습이다.

 

 

 

 

▶이덕대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현재)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

한국수필 신인상(2021)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선정(2023)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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