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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기억을 기억하고 싶나요 / 정이흔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2/12 [21:25]

버려진 기억을 기억하고 싶나요 / 정이흔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2/12 [21:25]

버려진 기억을 기억하고 싶나요 / 정이흔

 

 

긴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온통 처음 보는 광경뿐 

여기는 분명 내가 잠든 공간이 아니다 

 

잘 정돈된 유리병 사이로 묘한 플라스틱 냄새처럼 느껴지는 포르말린의 역한 악취가 스멀거리며 새어 나와 후각을 자극하고 눈앞의 유리병 안에는 뚫고 나오려 애쓰다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이름 모를 표본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나를 보는듯한 전율을 느낀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기억의 단편인데 

이미 잊힌 줄로만 알았던 기억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나 역시 유리병 안의 표본처럼 움직일 수 없는 

내가 있는 곳도 유리병 안이다 

 

흰 가운의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유리병 사이를 돌다가 내 앞에 멈춘다 두 손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유리병 뚜껑을 열어 나를 꺼낸다 날카로운 메스로 나의 뇌를 가르고 핀셋으로 무엇인가를 들어낸다 잘린 나의 파편은 프레파라트에 올려져 현미경의 재물대 위에 놓인다 그는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파편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른 파편을 찾는다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흘렀고 나의 잔해를 다시 유리병에 담았다 그가 나의 뇌 안에서 잘라낸 파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찾던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제야 생각난다 

그가 나를 헤집었던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그때마다 나의 파편은 여지없이 잘려 나갔다 

나는 알 수 없는 피곤함에 눈을 감는다 

 

그가 다른 유리병을 열기를 원한다 

그가 찾는 것이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도 이제 남은 나의 조각이라도 잘려 나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냥 내 안에 간직하고 싶다 

 

그는 나가고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든다

 

 

 

 

 

 

본문이미지

▲정이흔

제21회 시인투데이 시부문 작품상 수상

짧은 소설 모음 <초여름의 기억>

단편소설집 <섬>

에세이 <벚나무도 생각이 있겠지>

시집 <흩뿌린 먹물의 농담 닮은 무채의 강물이 흐른다>

인문집 <글쓰기가 두려운 사람은 책을 읽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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